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27년 화교배척폭동 (문단 편집) == 이후 == 폭동이 진정된 뒤에도 크고 작은 화교배척은 각지에서 일어났다. 주로 지역 청년회가 주도해서 선전선동하고 불매동맹을 맺어 조선인이 화교상점에 가지 못하게 막고, 화상점문을 주먹으로 두드리거나 발로 차고 욕을 한 뒤 도망가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7] 조선총독경무국은 1927년 화교배척폭동에 대해 책임을 회피했다. >『(중국관헌의: 저자) [[책임전가|조선인에 대한 압박 약간 노골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만주 및 조선 내 각 신문에 조선인 압박의 기사가 게재되자 재만조선인과 직접 관계있는 조선내 조선인에게 오른쪽 사실(압박 사실: 저자)의 과장적 정보 등이 제공되었다. 조선인 일반은 중국인(지나인)에 대한 증오와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근년 조선내 모든 사업의 융성과 중국(지나) 내지의 시국의 영향으로 도래하는 중국인(지나인)이 매우 많고, 노동자는 물론이거니와 잡화상, 포목상, 음식점 등 각 방면에서 조선인 동업자를 압박하는 상태로 인해 일반적으로 기분 좋게 생각하지 않은 때, 재만조선인 압박 상황의 선전이 이뤄졌기 때문에 보복적으로 조선 거주 중국인(지나인)을 박해하는 폭거가 초래되었다]].』[* 駐朝鮮中華民國總領事館, 「仁川鮮人暴動華人被害報告書」(상동).,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8에서 재인용] 조선총독부는 이번 사건의 직접 원인을 중국 당국의 재만조선인 박해이며 간접 원인은 조선 내 화교경제가 발달해서 조선인이 악감정을 갖게 된 것이라 주장했다. 중화민국 외교부가 북경의 주중일본공사관에게 주조선총영사관의 보고를 근거로 이번 사건에 항의하는 문서를 제출하니 일본공사관은 12월 24일 사건의 원인은 중국 당국의 재만조선인 박해에 있다면서 책임을 떠넘겼다.[*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8~299] 결국 끝나지 않은 갈등과 경찰의 무책임으로 [[1931년 화교배척폭동]]이 다시 한 번 터지고 말았다. [[분류:화교]][[분류:일제강점기/사건사고]][[분류:1927년/사건사고]][[분류:인종차별/사건사고]][[분류:폭동]]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